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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 개발의 역사

도시이야기/도시계획산책

by 도시연구소 2019. 7. 26.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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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

잠실은 섬이었다. 사람들은 잠실섬이라 불렀다. 마을이름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정조 13년 <호구총수>라는 책인데,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 안에 신천리, 잠실리가 등장한다. 세종 때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잠실섬에는 뽕나무밭이 무성했다. 누에를 치는 방이라 '잠실'이라 했는데, 오늘날의 잠실은 '동잠실'이라 했고, 신촌 연희궁 일대는 '서잠실'이라 했다. 그러나 홍수가 계속 일어나 뽕나무며 누에가 다 사라지고, '잠실'이란 이름만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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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섬

 

잠실섬은 일제시대까지 행정 구역은 '고양군 뚝섬면'이었다. 서울시로 편입된 건 해방 뒤인 1949년의 일이다. 강동구, 송파구, 강남구, 서초구 등 강남 대부분의 지역은 1963년에 편입된다. 1960년대 말까지 서울의 동쪽 끝은 뚝섬과 광나루였다. 서울 사람들은 '잠실'을 알지 못했고, 몇 사람만 엄청나게 큰 모래섬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광주대단지 사업

해방과 한국 전쟁을 거치며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틈을 타, 서울 시내에는 무허가 건물들이 가득 들어섰다. 무허가 건물은 1961년 8.8만 동에 이르렀고, 3년 뒤에는 11.6만 동에 달했다.

 

김현옥 서울시장이 부임하고 1966년 전수조사를 해보니 무허가 건물이 13.7만 동이었다. 김현옥 시장은 4.5만동은 개량해 양성화 시키기로 하고, 나머지 9.2만동은 서울 밖에 대규모 주택단지를 만들어 이주시키기로 계획한다.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수진리' 일대 300만평을 주택 사업지로 결정하고 10만 세대, 55만명이 들어갈 단지를 만드는 계획이었다.

 

1971년까지 160만평의 택지를 조성하였다. 여기에는 용산역을 비롯한 철도 주변 무허가 가구를 비롯해 서울 시내 곳곳의 무허가 건물에 살던 사람들이 강제로 이주되었다. 집을 지어준 게 아니었다. 땅만 조성되어 있었고, 강제로 내쫓긴 사람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20평에 움막을 치고 살아야했다.

 

광주로 이주한 사람들의 직업은 서울에 있었다. 서울로 출퇴근 해야 했던 그들은 버스를 타고 비포장 길을 달려 겨우 다녔다. 1970년, 서울시는 광주대단지에서 양재동(말죽거리) 까지 8.5킬로미터 구간에 폭 30미터 도로를 놓는다. 당시엔 ‘대곡로’란 이름이었으나, 지금은 ‘헌릉로’라는 이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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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 지도

 

잠실섬 공유수면 매립사업

광주대단지에서 양재까지는 연결이 되지만, 강북까지는 여전히 너무 멀었다. 강북까지 멀리 떨어진 만큼, 외따로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도 컸다. 서울시는 광주대단지와 강북 사이에 빈 공간에 가까웠던 ‘잠실섬’을 개발하기로 한다.

 

1971년 1월 잠실대교 가설공사가 착공한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까지 공유수면 매립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한강 변에 제방을 설치하고 공유수면을 매립한 다음 그 위에 도로를 놓으면 한강 바깥쪽으로 넓은 땅이 만들어졌다. 여의도가 개발되었고, 동부이촌동, 흑석동, 반포지구, 서빙고동, 압구정동, 구의동. 이렇게 한강변은 도로와 아파트로 점점 채워졌고, 개발의 손길은 잠실로 이어졌다.

 

잠실섬 공유수면 매립사업은 누가 봐도 이권이 막대한 사업이었다. 이를 민간에게 맡기기 보단 서울시가 직접 하는 게 공익적인 사업이었다. 서울시가 돈이 없으면 모르겠지만 서울시는 1969년 1월 공유수면매립을 직접 하겠다고 신청서를 건설부에 제출했다. 건설부는 몇 가지 핑계를 대며 미루다 1970년 8월에서야, ‘서울시가 직접 시행하기보다는 민자사업으로 시행함이 바림직하다’고 회신해왔다. 이유는 없었다.

 

손정목 교수는 ‘회신의 배후에 정치자금 제공을 둘러싼 알력과 흥정’이 있었으리라 추측한다.

아마 1969~1971년은 대통령 정치자금이 특별히 많이 필요해졌을 것이고, 따라서 김부총리가 일반기업체라는 자기의 고유영역을 넘어 건설업체에게까지 정치자금을 요구했을 것이다.
김 부총리의 요구에 대해 건설업체 대표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우리는 공사를 수주할 때마다 공화당 재정위원장에게 정치자금을 받치고 있다. 그런데 경제기획원장관이 또 정치자금을 바치라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라는 반발이었다. 그때 김 부총리가 정치자금 대신에 제시한 이권이 ‘잠실 공유수면 매립공사’였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이권이었다. 5대 회사 대표이사들은 선뜻 그 제의를 받아들였으며 부총리가 요구한 정치자금을 바친다.
손정목, <잠실지구가 개발되기까지 I>

국가 소유 하천에 제방을 쌓고, 하천 바깥쪽을 매립해 택지로 조성한다. 건설업 일거리가 없는 겨울에 중장비를 동원하면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다. 새로 생겨난 택지는 아파트 단지를 조성해 분양하면 된다. 어마어마한 이권 사업이다.

 

김 부총리가 5대 건설사(현대, 대림, 극동, 삼부, 동아)에 공유수면 매립 권한을 주기로 하지만,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의 반발에 부딪힌다. 서울시 권한의 일을 갖고 서울시장인 자신을 두고 내각에 있는 김 부총리가 생색을 내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였다. 정치자금을 막대하게 조성해 충성심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 터라, 서울시가 직접 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김현옥 서울시장

 

그러나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사고가 발생하며 김현옥 시장이 물러나고, 양택식 서울시장이 취임하며 공유수면 매립공사를 민간에 내준다. 잠실지구 공유수면 매립공사는 1971년 시작되었다. ‘실시계획 인가’라는 법적인 절차도 완료하지 않고, 불법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공유수면을 매립하기 위해선 흙이 필요한데, 매립을 하다 보니 흙이 부족했다.

 

그러자 잠실개발 주식회사(현대, 대림, 극동, 삼부, 동아)는 잠실에 있는 큰 언덕을 헐어 그 흙으로 매립을 하고 싶어했다. 그 언덕은 ‘몽촌토성’이었다. 1970년대에도 이미 그 언덕이 보통 언덕이 아니라 백제시대에 지어진 토성이라는 걸 알았다.

 

차마 백제시대 토성에 있는 흙을 갖다 부을 수는 없어 서울시는 시내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를 갖다 매립하도록 했다. 서울 시내에서 배출되는 쓰레기의 상당량은 연탄재였고, 2년간 연탄재를 깔고, 그 위에 흙을 깔아 매립공사를 마무리했다.

1977년과 1978년에 걸쳐 단계별로 준공했는데, 총 면적은 258만 제곱미터(75만평)이었다. 이 땅 가운데 11만평은 공공시설용지(제방과 도로)는 국가에 귀속되고, 택지 등 64만평은 잠실개발 주식회사가 소유했다.

참고문헌

손정목, <잠실지구가 개발되기까지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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