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터널은 1967년 금화터널은 1977년 뚫렸다. 1967년 전 서울에는 어떤 터널도 없었다.
사직터널(社稷터널)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에 위치한 약 160m의 터널이다. 독립문사거리와 사직단 사이에 있다. 서울특별시는 서울시미래유산으로 종로구 사직로 2길 일대의 사직터널을 선정하였다. [위키백과]
서울시에서 가장 먼저 생긴 도로터널이며, 길이는 136m에 달한다. 상·하행선으로 이루어진 구터널은 1967년 5월 30일에 준공되었는데, 길이 136m에 상·하행선 너비 각각 7.9m와 6.8m로 구성되었으며, 터널높이는 7.2m에 이른다.방수를 위하여 1·2차 각각 500㎜ 및 700㎜의 라이닝을 실시하였으며 내측벽면에 철제요철패널을 시공하였다. 상행선 단선으로 시공된 신터널은 1980년 8월 16일 준공된 바, 길이 136m에 차선너비 7.2m(2차로), 터널높이 6.8m로 구성되었으며 방수처리를 위한 라이닝 두께는 350㎜로 처리되었다.서울시내에 건설된 터널은 1970·90년대에 건설되어 보행자의 편의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기에, 보행자의 불편이 많았다.
이에 2008년에는 보행환경 개선사업을 실시하여 조명등 설치·차도와 보행통로 사이에 방음벽 설치·CCTV 설치·비상벨 설치 등의 공사가 이루어졌다. 이에 앞서 2001년에는 정밀안전진단결과를 바탕으로 터널 내 콘크리트 균열보수와 단면보수, 보도 및 배수로 정비 등의 보수공사를 하였다. 사직터널 보수작업을 통해 소음도가 감소하였고 또한, 누수방지를 위하여 PVC 유도관을 시공하고, 벽체부에 3m 높이까지 백색 자기질 타일을 부착하는 보수를 실시하였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사직터널(社稷─))]
1967년 1월 21일 독립문과 사직공원 앞을 연결하는 사직터널이 착공 2년 2개월만에 개통되어, 김현옥 서울시장을 비롯한 관계자와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통식을 가졌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과 봉원동을 잇는 터널.
높이 6.80m, 너비 9.0m×2, 길이 555m, 면적 9,990㎡. 1977년 4월 1일부터 1977년 8월 16일까지 삼부토건주식회사에 의하여 17억 2천만원을 들여 건설되었다.이 터널의 단면은 순차선너비가 7.2m이고 갓길 너비 및 유지관리원의 통행에 필요한 공간이 좌우 각각 0.55m 및 1.25m로 구성되어 있는데, 수직측벽에 반단면 원호아치를 연결한 형상으로 되어 있다.바닥면은 두께 15㎝의 콘크리트 위에 두께 5㎝의 아스팔트를 포장하였으며, 횡단구배는 1.5%로 하였다. 방수처리를 위한 라이닝의 두께는 좌우 각각 750㎜로 하였으며, 배기를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단일종단구배로 시공되었다.마감처리에 있어서 기존단면은 본타일·스티로폼·수지를 사용한 반면 보수단면에는 자기질 타일을 바닥에서 2.8m 높이까지 덧붙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금화터널(金化─))]
독립문은 영은문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조선시대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신을 영접하던 곳이다. 1407년(태종 7)송도(松都)의 영빈관을 모방하여 서대문 밖에 건립하여 이름을 모화루(慕華樓)라 하였다. 모화루 앞에는 영은문(迎恩門)을 세우고 남쪽에 못을 파 연꽃을 심었다.1429년(세종 11) 규모를 확장하여 개수하고 모화관이라 개칭하였다. 중국 사신이 올 때는 2품 이상인 원접사(遠接使)를 의주에 보내고, 선위사 또한 2품 이상인 자로 도중 5개처에 보내어 맞게 하고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였다.서울에 도착하면 이 모화관에 드는데, 이 때 조선의 왕세자는 그의 앞에 나아가 재배의 예를 행하고 백관도 재배의 예를 행한다. 이 때 백관은 반을 나누어 사신이 도착하기 전에 관에 나아가 대기하였다.또, 사신이 돌아갈 때는 백관이 품계의 정종(正從)의 위치를 달리하여 두 줄로 섰다가 일제히 재배례를 행하였다. 그 뒤 청일전쟁 이후 모화관은 폐지되고, 1896년서재필(徐載弼) 등이 독립협회를 세우고 그 모화관을 사무실로 쓰는 한편,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고 모화관을 독립관이라 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회관으로 사용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모화관(慕華館))]
그 후 독립문을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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