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들이 북미 대륙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이 1600년대 초.. 유럽인들과 교역을 해야 되기 때문에 주로 북미 대륙의 동부 지역에 사람들이 정착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모여 살며 마을과 도시가 만들어지고 성장하는데, 이때 가장 기본적으로 만들어지는 도시의 형태가 격자형 배치입니다.
1672년, 찰스톤에서 격자형 형태의 타운이 만들어지고
1681년~1683년 사이에 윌리암 펜(William Penn, 1644~1718)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광활한 사유지에 계획적인 타운을 만듭니다. 그것이 지금의 필라델피아..
18세기부터는 도시를 건설할 때 ‘격자형'으로 배치하는 방식이 일반적인 것이 되어, 피츠버그, 신시내티, 렉싱턴, 루이즈 빌, 세인트 루이스 시에서도 중심부는 격자형 배치로 건설되었습니다.
격자형 배치가 좋은 점은 무엇일까요? 장점이 있으니까 이렇게 빠르게 널리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이겠죠?
도시 내 어느 곳이나 일정한 크기, 일정한 가로폭으로 블록 모서리 땅에서도 건축이 편리하고(도로가 사선이거나 원형이라면 그 옆의 땅은 건축하기가 어렵겠죠?) 토지 거래가 용이한 점 때문이었습니다.
격자형으로 배치된 도시를 보면, 도로들이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있죠. 이렇게 곧게 뻗은 도로는 도시를 상징하는 하나의 요소입니다. 구부러진 길은 농촌이고, 직선 도로는 도시라는 이미지가 형성된 것이죠.
한편 1791년 프랑스인 랑팡(1754-1825)은 유럽 귀족적인 바로크 풍의 도시 요소들을 수도 워싱턴(Washington D.C.)을 계획하는데 적용합니다. 바로 방사형 배치였습니다. 필라델피아의 격자형 체계와는 다른 배치였습니다.
랑팡의 워싱턴DC 계획은 당시 가장 큰 규모였던 필라델피아보다 9배나 큰 거대 도시계획이었습니다. 워싱턴DC의 계획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이 성공으로 격자형 배치 위에 대각선으로 도로가 뻗어나가는 바로크 스타일의 계획이 유행처럼 이어지게 됩니다.
버팔로(1804), 디트로이트(1805), 인디애나폴리스도 중심에 초점을 두고 격자형 가로망 위에 대각선으로 뻗어나가는 가로망 계획을 채택하였습니다.
그러나 1811년 뉴욕 시는 격자형 가로망 체계를 제안하였습니다. 격자형이 토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지형에 구애받지 않고, 확장이 편리하며, 조성비용이 저렴하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격자형 배치를 대대적으로 도입한 뉴욕의 가로망 체계는 랑팡의 워싱턴DC 계획에 필적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격자형 배치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미국 도시의 도시 구조를 지배하는 방식
1840년대 이후 대도시들이 출현합니다. 이들 도시들은 농업경제에 기반을 두고 농산물을 수출하는 교역지 역할을 합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동부에 있는 뉴욕, 보스턴, 필라델피아, 볼티모어 등 항구를 갖춘 도시들이 유럽의 산업 중심지와 주요 시장들을 연결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19세기 초부터 주거지역이 동부지역에서 서쪽으로 팽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조업 또한 동쪽에서 서쪽으로 확산되었으며 유럽 이민자들도 서쪽에 많이 입주하게 되며, 1870년대부터는 중서부 지역의 도시, 시카고와 같은 도시들이 빠른 속도로 성장합니다.
19세기 들어 기차가 들어서며 인구 이동이 급격하게 증가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 들었고, 도시의 인구 집중으로 인해 도시 중심부에는 열악한 거주환경이 형성되었습니다.
대도시 중심부에 빈곤지역이 밀집하여 형성되고, 항구 도시와 산업도시에서는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하였습니다.
뉴욕과 보스턴과 같은 도시에는 이민자 임차인 주거단지가 등장하는데, 이들 거주지는 결코 양호한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뉴요커 5명 가운데 3명이 하층계급이었다고 하는데, 이들에게도
쾌적한 주거공간, 자연채광과 맑은 공기, 여유로운 가정생활과 청결한 환경에서 살 권리가 있지 않을까요?
뉴욕과 시카고를 포함한 다른 10여 곳의 도시에서도 이민자들의 주거사정은 비슷하였는데요, 사회학자이며 도시계획가인 페리(Clarence Perry, 1872~1949)는 뉴욕의 포레스트 힐스 가든을 조사하다 이민자들의 사회적 통합과정에 물리적 계획과 설계가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매우 중요한 발견이었죠. 그리고 페리는 20세기 현대 도시계획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이론 중의 하나인 근린주구이론을 1923년에 발표하였습니다.
근린주구이론 Keyword : Neighborhood Unit, Clarence. A. Perry, 주거단지계획, 초등학교 생활권, 래드번, 뉴어바니즘
1. 개념 - Clarence. A. Perry가 제시한 주거단지계획 개념 - 초등학교 통학거리 및 인구규모를 표준 Unit로 설정
2. 페리의 근린주구 원칙(6가지) - 규모 : 주거단위는 한 개의 초등학교 인구규모를 가져야 하며 그 규모는 인구밀도에 따라 변동(일반적으로 5천~6천명) - 경계 : 주구 내를 관통하는 통과교통은 방지하며 차량의 우회통과를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충분한 넓이의 간선도로에 의해 구획 - 오픈스페이스 : 주민의 일상생활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소공원과 위락공간체계를 계획에 의해 배치 - 공공시설 : 주거단위에 알맞은 면적의 학교와 그 밖의 공공시설들은 단지의 중심위치에 적절히 통합하여 배치 - 상업시설(근린생활시설) : 주민에게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1~2개소 이상의 상업지구를 주거지 내 또는 교통의 결절점이나 인접 근린주구의 유사지구 부근에 설치 - 주구내 가로체계 : 외곽의 간선도로는 예상되는 교통량과 균형을 이루어야 하며, 내부 가로망은 단지 내의 교통을 원활하게 처리하고 통과교통을 방지하도록 계획
3. 근린주구이론의 한계성 - 현대의 도시민들은 한정된 공간 속에 속박되기 싫어하고 이동성 증가로 자족적인 생활단위로의 제한은 무리라는 비판 - 근린주구의 이론적 규모는 이론적으로 자족적인 주거단위를 형성하기에는 너무 작음 - 계층간, 인종간 분리(Segregation)를 조장하여 근린주구계획가들이 이룩하고자 하는 사회적 지표를 오히려 저해 - 신축성 결여. 고정된 학군제와 쇼핑센터, 변화없는 토지이용을 추구하여 장래의 변화나 발전에 대한 고려가 없음
4. 한국 근린주구와의 비교 가. 적용 내용 - 주거환경을 보장하는 최소 생활권 단위개념으로 정착 - 단독주택지 외에 아파트 단지까지 개념 확대 - 단지내 상가, 보행자 전용도로 체계 등 활용 나. 차이점 - 한국에서는 아파트 단지가 보편화되어 체계적 녹지확보가 어려움 - 학교나 커뮤니티 센터 등 공공시설이 분산되어 교류의 장 역할의 어려움
5. 함께 알아둘 내용 - 래드번Radbun - 뉴어바니즘New Urbanism : 1992년 근린주구의 새로운 시도로 신전통 근린주구론(Neo-Traditional Neigborhood = New Urbanism) 대두
도시로 인구가 집중하고, 도시 규모가 성장함에 따라 사회적 무질서도 높아지게 됩니다. 이미 19세기 말부터 도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은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
그 중 도시계획의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도시미화운동인데, 이 운동을 통해 도시계획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893년 3월 건축가, 조각가, 화가 등 예술가를 중심으로 '뉴욕 시립예술회'가 결성되며, 그 뒤를 이어 신시내티(1894), 시카고, 클리블랜드, 볼티모어에서 '아름다운 도시 만들기' 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도시의 광범위한 주제들(가로등, 공원, 문화회관 건설 등)에 대하여 참신한 제안을 하였습니다. 이들 예술가들의 협동작업에 의한 '아름다운 도시 만들기' 시립예술운동은 '도시미화운동'의 출현을 촉진하게 되었습니다.
'도시미화운동'은 기존 도시를 개선하고 도시 외관의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해 도시계획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다니엘 번햄(Daniel Burnham, 1846-1912)이 계획한 '시카고 계획(Plan for Chicago, 1909)'입니다.
또한 '도시미화운동'은 공원체계를 조성하여 열악한 경 속에 살고 있는 시민의 정서를 순화하고자 하였습니다. 프레드릭 옴스테드(Frederic Law Olmstead, 1822-1903)는 1858년 현상설계에 당선된 뉴욕 센트럴 파크 설계를 비롯하여 여러 도시의 대공원 설계를 통해 이와 같은 신념을 실천하였습니다.
프레드릭 옴스테드는 '시카고 계획'에 번햄의 조수로 참가하였고 도시미화운동의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칩니다.
1893년 시카고에서 개최된 세계무역박람회 건설을 맡은 번햄은 '도시미화운동'을 주도하여 종합계획을 등장시켰습니다. 프레드릭 옴스테드는 시카고 세계무역박람회에서 '보자르 식' 설계방식을 채택해서 긴 가로수 길을 배치하고 건물 표면을 유광의 백색으로 처리했으며, 동상의 배치도 자유롭게 하였습니다.
1901년 '공원체계'를 연구하기 위한 위원회가 조직되는데 번햄이 위원장이었고, 옴스테드와 건축가 찰스 맥킴(Charles Mckim), 조각가 고딘(August St. Gaudens) 세명으로 위원회를 조직하고 유럽의 도시들을 답사하였습니다.
그리고 1905년에서 1909년 사이에 미국의 38개 도시에서 도시계획 보고서가 출간되며 도시개발을 위한 종합계획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 중 번햄은 도시와 관련된 모든 주요 아이디어를 하나의 거대한 도시개념으로 융합시켜 미국 도시계획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바로 '시카고 계획(1909)'입니다. 번햄의 시카고 계획은 미국 도시계획에서 손꼽히는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시카고 계획'에서 도심에 비중을 두면서 업무지구가 도심에서 외곽으로 자연스럽게 팽창하도록 배치하였습니다.
번햄은 도시설계를 위해서는 개발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번햄은 '도시미화운동'의 설계 및 계획적 요소에 대한 아이디어를 '시카고 계획'에서 풍부하게 제시하였습니다.
도시내부와 외곽에 배치한 방대한 공원체계, 도시공원, 놀이터 23마일에 이르는 호수변 공원 방사형과 대각선형의 간선도로를 연결하는 가로망 체계 수립 도심에 입지한 철도역 단지 박물관 복합단지 대규모 광장을 끼고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돔형의 탑을 가진 시청사
이들 내용을 통해 '도시미화운동'에서 시작한 시카고 계획이 종합적인 계획으로 자리매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도시 만들기 운동 → 도시미화운동 → 도시계획 및 설계
도시미화운동 Keyword : 1893년 시카고 세계박람회, 1909년 시카고 계획, 번햄, 버넷, 옴스테드, 공원정비운동, 도시공원 건설
1. 개념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도시토지이용이 기능적 효율성에 치우친 도시경관이 점점 비인간화됨에 따라 인간성 회복을 위한 도시 건설을 제창한 운동
2. 주요내용 - 1893년 시카고 세계박람회가 열리면서부터 영향을 받기 시작 - 1930년대 미국 도시의 과밀화와 무질서화에 대한 대응방안으로 시행 - 도시계획에 있어서 CBD(중심상업지구) 내 건축물의 예술성 강조 - 가로, 광장 등의 문화적 조형성을 갖춘 도시공원의 건설 - 도시공간에 질서, 위엄, 기념비성을 부여 - 공원의 정비와 환상공원도로의 확보
3. 사례 가. 옴스테드가 주축이 되어 대대적으로 전개한 시카고시의 '공원정비운동' - 시카고 공원정비운동은 1864년 "도시를 공원 속에"라는 구호를 내세워 공원의 확보와 개량에 힘쓰면서 1880년까지 수많은 공원과 소공원과 미관지구를 건설 - 이후 공원을 계통화시키는 경향으로 발전하여 공원을 광역적인 지역계획의 차원으로 발전시킴(예, 1902년 보스턴 대도시권 녹지계통 조성) 나. 1909년 번햄과 버넷의 '시카고계획'
'도시미화운동'이 미국 도시계획사에 기여한 공로는 도시종합계획의 출현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도시미화운동'을 경험하면서 도시계획의 작성이 촉진되었고 더 나아가 '도시 만들기 학문(Science of City Making)'이 제안되었습니다.
1909년 5월 워싱턴DC에서 열린 '제1차 도시계획 전국회의(The First National Conference on City Planning)'에서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단순히 아름다움의 관점에서만 도시를 접근해서는 안되며, 사업비를 고려한 계획이라는 학문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회의 이후 '도시미화운동'의 열기는 점차 수그러들며, '지역지구제'를 중심으로 하는 '기능적 도시계획운동'이 부상하게 됩니다.
1910년 뉴욕 로체스터에서 열린 제2차 '도시계획과 인구과밀회의'에서 '도시종합계획'의 중요성이 채택되었고, 도시계획은 '도시미화운동'의 계승자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 이후 대위원회의에서 제2차 회의명칭을 '도시계획 전국회의(National Conference on City Planning)'로 결정하고, 옴스테드를 의장으로 선출하였습니다.
옴스테드는 도시의 개발에 관한 결정이 선출된 공무원들에 의하여 합리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1911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3차 도시계획 전국회에'에서 옴스테드의 주도하에
'도시의 여러 요소들은 상호 연결되어야 한다'는 원리와 '최상의 공익추구는 도시계획의 틀 속에서 가능하다'는 신념을 결합한
도시계획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 후 도시계획에서 '사회 대개혁' 측면보다는, 도시를 시스템과 조직 모델이라는 측면에서 연구하게 되며, 현실 파악과 문제 해결을 위한 여러 가지 분석기법과 기술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도시의 상수공급, 하수처리, 공원, 도로 등의 다양한 시설을 종합하여 계획하고, 도시계획시설사업을 통하여 도시의 물리적 형태를 만들어내는 영역으로 전문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미국 도시계획사에서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던 시민을 위한 '공익에 기반한 도시계획'이라는 새로운 전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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